아무래도 직업이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또는 소프트웨어 개발 관리자다 보니, 굶지 않으려면 죽을 때까지 학습을 게을리 할 수가 없는 입장이고, 그러다보니 불가피하게 영어로 쓰여 있는 원서를 피해갈 수가 없다.

물론 좋은 번역서들이 끊임 없이 나오고 있긴 하다. 하지만 몇 가지 국내 상황으로인해 번역서를 마냥 기다리기에는 답답한 면이 있다.

  • 국내에 번역서가 나오기까지 빠른 경우에도 수 개월, 경우에 따라서는 몇 년이 걸리기도 한다. 소프트웨어 관련 서적의 수명이 상대적으로 짧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내가 변역서를 손에 쥔 시점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나보다 더욱 앞서나간 상태일 것이 분명하다.
  • 대한민국 IT 출판 시장의 규모 때문에 애시당초 번역서로 나올 수 없는 책들이 있다. 아무리 좋은 책이라 해도 누군가 손해를 보면서 번역서를 만들어주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노릇이다.
  • 기술을 선도하는 이들(주로 미국 등 영어권)과, 그 뒤를 따라가는 이들(국내)에게 필요한 정보는 다를 수 밖에 없다. 서로 환경이 다르고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다르기 때문이다.

물론 원서를 읽는데 전혀 무리가 없다면 이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다. 아마도 고민이 있다면 해외 구매로 인해 비용이 좀 더 든다는 것 정도가 아닐까? 그런 능력이 있다면 좋겠지만, 나를 비롯한 대부분에게는 원서를 술술 읽는다는 것이 짧은 시일 안에 이루기 어려운 이야기다. 이런 조건에서 원서를 읽으려다보니, 그 내용을 빠르게 파악하는 나만의 노하우(?)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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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목차를 마인드맵으로 그려본다.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의 전반적 구조를 파악하는 데 목차만한 것이 없다. 편견일지 모르지만, 목차를 봐도 기승전결 구조나 흐름을 파악하기 어렵다면 차라리 비슷한 주제의 다른 책을 보는 편이 낫다. 일단 목차를 마인드맵 형태로 그린 다음 한 발자국 떨어져 바라보면, 그냥 책에 있는 목차를 볼 때와는 다른 것들이 보인다.

둘째, 마인드맵을 더 상세하게 발전시킨다.

본문을 빠르게 넘기면서 눈에 띄는 부분을 마인드맵에 추가한다. 예를 들면, 목차에는 없는 소제목이나 인용구, 불릿, 굵은 글씨, 그림 제목 등 중에서 눈에 띄는 것들을 마인드맵에 추가하여 그림을 더욱 풍성하고 상세하게 만든다.

셋째, 마인드맵을 한글로 번역한다.

이 시점에서 마인드맵은 원서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옮긴 것이기 때문에 영어로 되어 있다. 영어가 눈에 팍팍 들어오는 수준이었다면 마인드맵 따위는 그리지도 않았을거다.ㅜㅜ 그렇기 때문에, 마인드맵을 최상위부터 레벨을 점점 아래로 낮춰가며 노드들을 하나씩 한글로 번역하고 같은 노드 안에 번역한 내용을 추가한다. 이때, 원래 있던 영어는 지우지 않는 편이 좋다. 굉장히 흔히 보는 단어라 할지라도 맥락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하는 단어들도 많고, 본문 앞뒤를 살펴보지 않으면 해석이 곤란한 것들도 있기 때문에 나중에 계속 참고해야 한다.

넷째, 번역한 내용을 다듬는다.

지금까지 그린 마인드맵은 거의 직역해놓은 것이기 때문에 딱 봐도 앞뒤가 안맞는다. 본문 내용을 참고하면서 번역을 조금씩 다듬어나간다. 사전적 의미와는 다른 전문 용어가 있다면 본문에서 그 정의를 찾아보고 적절한 번역으로 바꾼다. 대개 용어의 정의는 해당 챕터 초반에 나온다.

다섯째. 중요한 부분이나 눈길을 끄는 챕터를 상세히 읽는다.

내 경우 원서 한 권을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하는 일은 고행에 가깝다. 사실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본 원서는 손가락에 꼽는다. (아마… 두 세 권 정도?) 여기까지 마인드맵을 그렸다면 분명히 그 과정에서 읽어보고 싶거나 중요해 보이는 챕터가 있었을 것이다. 우선 그 챕터부터 상세히 읽기 시작한다. 거기에서 시작해서 자연스러운 흐름을 따라가며 다른 챕터로 옮겨가기도 한다.

코드가 많이 나오는 책들은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없이 그냥 코드 위주로 보는 것이 더 좋다. 내가 주로 보는 원서들은 그 주제가 소프트웨어 공학이나 프로젝트 관리, 개발 문화, 변화 관리, 리더십, 개발 프로세스, 방법론, 퍼실리테이션 등이기 때문에 이런 방법이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가끔은 마인드맵을 그리는 시간에 차라리 영어 공부를 하는 편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아직까지 원서를 읽는 이보다 더 효율적인 방법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이런 방법으로 원서를 보는 것은 어디까지나 내가 생각하기에 나에게 잘 어울리는 나만의 방식이다. 아마 사람들마다 각자 어울리는 방법이 따로 있지 않을까.